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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사 이모저모 #2

대깨부 2025. 4. 13. 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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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회에 걸처 연제

엊그제 4월 11일은 나에게 각별한 인연이 있는 날이다


1994년 6월 말 "상해임시정부 최초청사 철거 자재 국내 반입" 각종 언론및 TV 에 기사화된 사건이다

직장 생활을 하고 있는데 평소에 잘 알고 있는 업체 사장님이 (당시) 오부장 남자가 태어나서 명예로운 일을 해야 한다

 

며 상해임시정부 청사 철거물 국내 반입 준비 과정을 설명한다

고민 하다 함께 참여 하기로 하였다

상해임정건립추진위원회 사무총장 직함을 받고 실무책임자 역할이 주어진다

동분서주 하며 인천항에 컨테이너 28개가 마지막 도착 했다

4 차례 화물이 도착한 마지막날,  MBC와 조선일보에 툭종 기사화가 되었다


이현희 교수가 제보 한다

상상을 초월 한 취재 요청과 가자들의 만남은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상해임시정부 최초청사 국내 반입은 국가가 해야 할 사업을 민간단체의 주도적으로 반입 했기 때문이다

당시는 대한민국과 국교 수립 직후이며


국가공무원도 중국애서 마음대로 활동 하기 어려운 시기였다

하물며 민간단체 이름으로 중국 정부. 상해시 정부의 승인으로 폐건축 물 자재 반입은 상상도 못 했다

상해임시정부 철거 건축물을 국내 반입하게된 사연이 있다

청주 거주 고)오성환옹 (29년생)은 친구들과 포항, 아산 앞바다에서 보물선 유적을 찾는 취미 생활을 하였습니다

역사적 이야기를 해야 겠다


조선 고종황제가 전주 전봉주 민난이  발생하자 조선 정부는 청나라에 청군 파병을 요청한다

청나라는 중국, 일본간 텐진조약 협약으로 조선으로 가려면 상호통보 한다 는 국가간 약속으로 일본에게 통보 한다

일본은 국제 정세와 중국 침략 기회를 염탐하고 있는 사대라 했다

충남 아산만 일대. 풍도, 율도 등에서 일본군이 사전에 도착 해서 청나라 배를 급습하여 침몰사건이다

이것이 청일전쟁 시작점이며. 오성환 회장은 침몰된 "고싱호"잔해를 전두환 대통령 시기에 보고 하였다

군사정권은 민간인 출입을 못 하게 하여 인양 발굴을 못하였자만

 

아산만 일대 산제한 도서지역에서 청군의 유해를 발굴 하였다.


중국 정부에 현지상황을  다각적인 방법으로 발굴 상항을 알렸다

최선를 다해서 유골 송환및 위령탑 건립 추진계획을 전했다

88서울 올림픽이후 9월 26일.


중국 사회과학원 28명이 국내 입국 하여 소상한 내용을 듣고 간다

모두가 고위직. 국무위원이 다수가 왔으며 일체 사진 촬영을 못 했다 기록을 남길수 없다고 한다

수 차례 서신 왕내가 있었으며. 중국 정부에서 오성환 일행을 초청 하였다

중국정부는  감사의 표현으로 답례방법을 찾고 있었다. 만날때 마다 무엇을 도와줄까요가 인사다

중국을 수시로 방문 하면서 국내 학자들의 의견은 상해임시정부청사들이 멸실 될 예정이다 고 한다

상해임시정부청사를 이전 복원 하거나  

 

안되면 철거 해서 국내 반입 해달라는 의견이 있어서 중국 정부에 우리 의견을 전 했다

오성환 회장은 독립운동 사업을 한다는 자부심으로 사적인 일울 마다하고 명예로운 일 하가로 한다

1개월 후, 중국 뻬이징 방문시에 중국 국무위원은 오성환 일행에게 상해시를 갈 것을 전하며,  

 

이미 비행기 티켓 를 준비 해왔다


상해 공항으로 갔으며 상해시 공무원 영접을 받게 된다

중앙 정부의 협조로 간 일행은 상해시의 안내 받아 상해시 실무책임자는 극진하며 무엇이든 도와 주겠다 한다

상해시 정부는 상해시 로만구 보창로 329호를 철거 직전에 일행을 안내 하였다

상해시에 철거물 관리를 신중히 취급 요청하면서 상해시 문물 관리창고에 보관하도록 부탁한다

위 상항을 보훈처와 독립기념관, 문제부등에 보고 하였지만 국가도 못하는 사업을 민간단체가 한다는 것에 반신반의 하였다

국사편찬위원의 학자(이현희 등)들의 추천으로 "김신부로 22"를 매입 조건과  추후 보상 약속 하고.

 

상해시 공무원을 설득해서 보창로 329호 철거물과 함께 보관 하다가 1

 

993년 12월부터 상해시 협도로 국내 반입 시작 된다

중국인들은 중앙 정부의 지시가 무서워 협조를 하면서도 뒤로는 이익을 챙기려고 했는데

 

보창호 329호는 무상기증 히고, 김신로 22호 철거물은 차후 보상 하기로 했다

협의 과정에서 중국은 북한을 의식해서 국내 반입 하고

 

복원이후 까지 언론 보도를 1년 이상 하지 않도록 당부가 있었다

마지막 1994년 6월 말에 인천항에 컨테이너 28개가 도착 하면서

 

성신여대 이현희 교수가 언론에 제보 하여 특종 기사화가 된다

각종언론으로 국회. 청와대에서 관심의 대상으로 김영삼 대통령의 오찬 약속이 있다고 발표 한다

그러나 한시준 교수와 이현희 교수간의 학술단체에서 학술적 이견아 터졌다

이현희 교수가 연구한 김신부로 22호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국가보훈처와 독립기념관의 모든 문건이 김신부로 22호가

 

상해임시정부 최초청사 라고 기록 하고 있는데 현지 위치가 다른곳에 있다 고 한다

김신부로 22가 지번 변천으로 다른 건축물을 철거 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잘못 반입된  철거물 이므로 가짜가 된다는 결론이다

학계의 의견이 사실화 되면서 국가보훈처는 민간단체의 국내 반입으로 망신살 탔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리며

 

일부 공무원은 감정적으로 대면 하기 시작 했다

학계에 학술용역를 하여 용역보고서 를 가지고 김신부로 22호를 보창로 329호 와 함께 반입 하였지만 

 

 보칭로 329호 마져 가짜 취급 당한다

보창로 329호는 보훈처와 독립기념관 내부 보고서에 4번째 이전 하여 사용하였고

 

임정요인숙소라 복원 가치가 없다고 하여 검증 철자를 무시하고 외면하였다

지금까지도 상해임시정부 최초청사 연구를 보훈처가 못하는 이유가 있다

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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